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사건의 발단은 [[제주 4.3 사건]]'''으로, 여수에 주둔하면서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14연대 병영에서 [[남로당]] 계열이 침투한 1개 [[대대]]의 [[장병]]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한다. 14연대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서 10월 초부터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하여 공급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식무기인 [[M1 개런드|개런드]] 소총과 [[M1 카빈]], [[자동소총]], [[기관단총]]을 비롯 각종 통신장비 등이 다른 부대에 앞서 우선적으로 100% 공급되었다. 그리고 종래 가지고 있던 일제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아직 반납하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상시보다 2배에 달하는 6천여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어서 남아도는 소총으로 반란 후 민간인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여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군과 경찰 사이의 알력이다. 군과 경찰의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제국 경찰]]이었다. 당연히 마주치기도 어려운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에서 직접 수탈하는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문제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어 버린 셈이다. 어제의 일본 순사들이 [[경찰공무원/제복|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복장이 터진 이들은 모조리 국군(과 그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지만, 이들은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했으므로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경찰 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바로 이 여순사건의 주역인 남로당 김지회 조차 왕년에 일본군 소위였다. 일본군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군 경력자를 찾기 매우 어려웠다. 군을 재건하는 일은 군 경력자의 조언 내지는 직접적인 활약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일본군 출신자들이 군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광복군|광복군]] 출신자는 그 수가 매우 적어서 본격적인 군사조직을 구성하기는 무리가 많았다.[* 양보다도 질적인 문제때문에 무리였다. 초기 한국군은 일본군-만주군-국부군-독립군 순으로 명확한 질적 차이가 있었다.] 이후 경찰과 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로 발전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도 속속 국방경비대/국군에 입대했고,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데다 미군정에서도 별 말이 없으니 특별한 신원조회 없이 군에서도 무작정 받아들였다. 이는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자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 내내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경찰을 싸고 돌고 군부를 찬밥 다루듯 하자[* 무장 면에서도 경찰측이 우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6.25 전쟁]] 때도 당시 주력 소총인 [[M1 개런드]]과 [[M1 카빈]]는 군보다 경찰이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6.25 전쟁 때 KAMG의 한국군 축소 및 개편안의 내용 중에 경찰에게 지급된 반자동소총들을 회수하여 적지 않은 볼트액션식 소총을 보유한 군장병들에게 몰아주자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다. 때문에 군이 후퇴하는데 '''경찰이 소총을 들고 북한 정규군과 맞서는''' 웃지 못할 사건들이 빈발했고 후방 [[빨치산]]과 싸우던 경찰을 향해 미군이 공격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경찰치고는 무장이 너무 좋아서 위장한 북한군인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군사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 [[4.19 혁명]]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강경진압한 것과 달리 계엄군이 시위대에 유연하게 대처한 것에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4연대의 기간병은 군경의 무장충돌인 [[영암사건]]을 일으킨 제4연대 출신이었다. 48년 9월 24일에는 구례경찰서 직원 1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당시 육군은 돈이 없어서 계급장 대용으로 단추를 꿰매어 달아 개수차로 분별을 했는데, 문제는 이 단추가 경찰 정복 단추와 비슷했다. 이것을 버스 안에서 본 경찰들이 거지들이라며 놀렸다.] 몰려든 구례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 뒤 구금되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 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은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번 보복하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